지난달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총리가 우리 대통령과 통화 중에 뉴질랜드 주재 우리 외교관의 성범죄 의혹을 제기해 큰 관심사가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뉴질랜드 측의 요청사항이나 입장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현지 사법의 역할을 중시하는 속지주의적인 전통을 지닌 영미법계에 속한 뉴질랜드 및 성 인지 감수성이 높은 아던 총리 내각의 성향을 고려할 때 해당 우리 외교관이 현지 사법당국에 출석해 수사 및 소추에 협조할 것과 나아가 수사 필요상 사건 발생 장소인 우리 대사관 구내 현장검증이나 폐쇄회로 영상자료, 대사관 직원에 대한 증인심문 등을 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언론에서 비엔나 외교관계협약에 규정된 외교관의 특권과 면제(privileges and immunities)를 면책특권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 국회의원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외교상의 특권과 면제는 책임이나 처벌을 면하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외교관이 방해받지 않고 원활하게 임무를 수행하도록 주재하는 나라의 사법권을 포함한 공권력의 관할로부터 벗어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범죄는 면책이 되지 않음으로 관할권을 가진 다른 나라, 즉 속인적 관할권을 가진 본국의 관할과 처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외교관으로 주재하는 동안 개인적 범죄에 대해 처벌받지 않지만 나중에 개인 자격으로 그 나라를 방문했다가 처벌될 수 있는 것이다.
뉴질랜드 측의 입장은 일정 이해가 되지만, 이 사건은 공무상 행위가 아닌 개인적 사안이고 현재 해당 외교관의 뉴질랜드 근무가 이미 종료되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외교관의 특권과 면제와 관련이 없는 개인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뉴질랜드 당국은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해당 외교관에 대한 직접 조사를 위한 출석을 일단 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뉴질랜드 사법관할권의 밖에 소재하는 해당 개인이 자발적으로 응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뉴질랜드는 물론 우리 당국도 수사 절차에 출석을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뉴질랜드 당국은 현재 발효 중인 양국 간 형사사법공조조약과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형사문제와 관련한 진술청취, 증언 등 수사에 협조하는 공조나 처벌을 위한 인도 요청이 가능한 상태이므로 이런 공식적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열려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이러한 국제형사제도를 이용한 공식적 요청을 뉴질랜드 측이 우리에게 제기하였다는 소식은 없다.
특히, 뉴질랜드 당국이 웰링턴 주재 우리 대사관 구내 조사나 내부 영상을 요구하는 것은 비엔나협약에 의해 대사관 구역이 대단히 민감한 절대적 불가침 구역이라 좀처럼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뉴질랜드 측이 추구하는 사법정의 못지않게 중요한 우리 국가의 주권과 위신, 그리고 향후 선례로서 우리 외교제도 운영과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당연히 그 허용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대사관 구내를 촬영한 영상자료도 국제법상 당연히 불가침권을 향유하므로 우리측의 동의나 자발적 제공이 없는 이상 증거능력 자체가 부인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주재국 사법절차에서 증언의무가 없는 우리 대사관 직원에 대한 증인 조사도 당연히 허용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한-뉴질랜드 간 형사 공조와 범죄인인도 조약이 완비되어 있어 양국 사법당국 간 협조가 가능하고 양측 외교채널이 가동되고 있음에도 우리 외교 당국에 귀띔도 없이 바로 정상 간 대화에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면 그 정당성 여하를 떠나 정상외교가 가지는 위상과 성격을 고려할 때 뉴질랜드 측이 좀 성급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지난해 8월 영국 런던에서 미국대사관 소속 외교관 신분의 직원 배우자가 역주행 교통추돌 사고를 내어 영국 청년이 사망한 사건에서 미국 정부는 영국의 소추를 피해 거의 도피해온 동 사고자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범죄인인도 요청을 거절하면서 인도에 응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외교관 특권과 면제라는 외교 제도를 무력화하는 조치로서 수용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 생명의 상실을 초래한 명백한 위법행위에 대해서도 사법 협조를 거부한 미국 정부의 태도를 볼 때 사법 정의와 인권만으로 이러한 외교관계가 개재된 사안을 재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기 영화 시리즈 『007』이라는 것은 살인면허로 불리는 허구 소설상 창작으로 비밀입법으로 특별히 지정된 공무 수행자에 대해 범죄소추를 면제하는데, 007은 그 명단에 7번으로 기재된 인사라는 뜻으로 형사관할권의 존부에 민감한 영미권에서 특수 신분자의 특권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영국 번영의 토대를 놓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대한 암살 기도에 연루된 당시 스페인 대사 멘도사에 대한 소추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 외교관 특권/면제 제도의 신기원을 이룬 사건이라면, 중국 송대 인물『포청천』의 청년 시절을 묘사한 드라마에서 우리 고려 조정의 사신단이 중국에 와서 범죄적 수준의 횡포를 부리는데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무력한 송나라 조정의 실정을 다룬 것으로 보아 동양에서도 서구적인 완전한 특권/면제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지만 외교사절에 대해 형사관할권을 행사하는데 제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뉴질랜드는 가치를 공유하고 상호보완적 발전을 기할 중요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 온 맹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돌발 악재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엔나 외교관계협약상 특권과 면제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한도에서 양국 간 형사사법공조 제도의 활용이나 전문적 협의를 통해 문제해결을 기대해 본다.
(이용일 전 주코트디부아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