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718호를 포함해 약 13차례의 제재 결의를 받아 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 금지, 무기 금수는 물론, 무역, 해운, 항공, 금융거래, 여행, 투자, 기술 획득, 유류 수입 등 제반 분야에서 포괄적인 제재하에 있는 상황이라 정상적인 대외 교류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대부분의 대북한 제재가 유엔헌장 제7장(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및 침략행위에 대한 조치) 하의 결정(decision)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헌장 해석상 유엔 회원국은 일응 이러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구속되어 이행하여야 하는 법적 의무를 지닌다. 대한민국도 유엔 회원국으로서 이에 구속되므로 대북 교류와 협력에 심대한 제한을 받는 것으로 보통 이해되고 있다. 우리가 추진했던 개성공단, 금강산 및 남북철도연결 사업도 상당 부분 이러한 안보리 결의에 저촉되게 될 우려로 정상적 추진에 애로가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통일을 추구하는 우리로서는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교류와 협력이 유엔 제재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사실상 우리의 자주적 자결권 행사를 통한 통일의 추진은 북핵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나올 때까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게 된다. 과연 한반도 교류협력과 통일을 추진하려면 법률적으로 유엔 제재의 완화가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한반도 주민 전체의 집단적 권리인 자결권(right to self‐determination)의 행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자결권은 유엔헌장 제1조 상 유엔의 설립 목적이자 국제관계의 기초로 인정되는 핵심적 국제법의 원칙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유엔헌장 제7장에 근거한 대북 제재도 마찬가지로 헌장 상 근거를 가진 법률상 의무로 모든 회원국을 구속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통일을 위한 자결의 권리와 헌장상 안보리 제재 결의 이행의 의무가 충돌, 경합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헌법과 같은 국내법상으로 권리와 의무가 충돌하는 경우, 예를 들면 양심의 자유라는 권리와 국방의 의무가 충돌하는 사안과 같이 어떻게 권리와 의무의 저촉 상황을 조정하거나 선택하는 문제가 국제법 분야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권리/의무 충돌의 경우에는 저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조화롭게 해석하거나, 권리와 의무의 법적 성격을 따져 그 적용의 순서를 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자결권과 재재이행 의무를 조화롭게 해석 및 적용해 그 충돌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따른다면, 우리의 대북 교류와 협력은 가급적 유엔 제재와 저촉되지 않도록 최대한 유의해 추진해야 한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종합적이고 방대한 현행 대북제재로 인해 이러한 해석적 방법으로 남북 교류협력의 공간을 확보하기 용이하지 않으며, 현재의 답보 상태를 개선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을 타개하는 새로운 접근법은 없을까?
1차대전 직후 풍미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우리 민족의 기미년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우리 민족 전체가 자결권의 주체로서 일어서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정신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식민지 압제 하 민족 독립의 추구와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을 우려하는 서구 제국의 입장이 반영되어 자결권은 한때 법적 권리가 아니라 단지 정치적 성격에 불과하다거나 내용이 모호하여 명확한 법적 권리로 인정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유엔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새로운 국제질서와 국제법의 진보적 발전에 힘입어 자결권은 국제사법재판소의 동티모르, 코소보 등의 판례에 의해 명백하게 일반 국제법 질서의 핵심이자 모든 국가가 이를 인정해야 하는 일반적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소위 대세적(對世的, erga omnes) 권리/의무의 성격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대세적 성격을 가진 자결권은 국제법규범의 위계 상 최상위 지위인 강행규범(jus cogens)으로 인정되며, 여타 국제법 규범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해석이 있다. 국제강행규범이라는 것은 침략범죄나 집단살해(genocide), 기본인권의 심각한 침해의 금지와 같이 국제사회 일반이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법규범을 말한다. 자결권은 유엔 인권규약에서 규정한 대로 주민들이 그들의 정치적 운명의 자율적 결정과 경제, 사회 및 문화적 발전을 기할 권리로 이해되고 있다. 자결권은 다수 주민의 집단적 권리로 이해되기 때문에 그들의 자결권을 부인하거나 제약하는 것은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심각한 인권 유린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강행규범성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자결권의 강행규범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의 성립/행사의 요건 및 조건이 법률적으로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강행규범적 효력이 적용될 경우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난점이 일각에서 주장되어 왔는데, 주로 어느 규모의 주민 집단이 자결권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그 권리의 주체와 어떤 상황에서 발동될 것인지 객관적 조건을 국제법상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 동티모르, 코소보, 팔레스타인 등 피압박 주민의 법적 지위와 관련한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례로 확인된 자결권의 국제법상 위상은 명백하다.
한반도의 자주독립 국가의 수립은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국제사회가 예외 없이 인정해온바, 이는 한반도 주민 전체의 자결권을 국제사회 전체가 지지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단위의 정치적 지위를 결정하고 한반도 단위의 사회, 경제 및 문화적 발전을 기하는 자결권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최고도의 권리, 즉 강행규범으로 여타 법규범으로 이를 제한할 수 없다는 입론을 검토하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으로 보면, 유엔의 대북제재 이행 의무에 우선하는 권리로 인정되는 자결권의 발로로 남북한 및 그 주민들이 서로 사회, 경제 및 문화적 발전을 위해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제한되지 않으며 미래 통일을 위한 정치적 활동은 외부의 간섭 없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대북정책이 가급적 국제사회의 북핵 문제에 대한 조치와 보조를 맞추어 나가면서도 그 독자적이고 우선적인 성격을 고려해 추진되어야 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주요국과 국제사회에 적절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우리가 국제사회에 이러한 국제법상 원리에 기초해 설명하더라도 국제사회의 일각에선 여전히 정책적 측면에서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이나, 단순한 법적 논리뿐만 아니라 남북 교류협력을 통한 접근과 관여를 통해 북핵 문제 해결에 순기능을 더할 수 있다는 부분도 설득해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용일 전 주코트디부아르 대사)